그림 안팎에서의 유목                                                                                    이선영(미술평론가)

<On The Road Again 다시 떠나다> 라는 부제로 열리는 강유진 전은 몇 년 주기로 계속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녀야 하는 작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작업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다는 점에서 거듭되는 떠남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디를 가나 한가지 소재나 형식만 고수되는 부류가 있다면, 강유진은 자신이 던져진 상황에 긴밀하게 반응한다. 올해 초에 열렸던 전시에서는 수영장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전시의 통일성을 위해 한 소재가 집중적으로 보여졌다는 것 외에, 어디를 가나 수영장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변화에 직면할수록 중심추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낯섦 가운데서 익숙함을 찾으려는 무의식적 선택을 낳았을 것이다. 반대로 정주민들은 유목을 꿈꾼다. 지금 여기의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유목민이든 정주민이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보르헤스)에서 늘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가진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점점 더 비슷해져 간다. 오늘 우연히 이라크의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건설 회사가 건설한 도시 사진을 보았는데, 기능주의에 충실한 한국 아파트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기시감(deja vu)이 있었다. 근대의 경제적인 방식은 보편적인 문법을 만들어내곤 한다. 병원이나 군대 등 사회의 기본적인 조직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라크의 아파트 도시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탁 트인 벌판 위에 건설되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설된 지 얼마 안 된 유토피아지만 곧 디스토피아가 될 것 같은 기시감은 그곳이 분쟁지역이라는 것뿐 아니라, 늦게 근대화에 뛰어들었지만,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고 강력하게 근대화의 명과 암을 겪은 우리의 경험 때문이다. 수영장이나 아파트로 대변되는 기능주의적 보편 문법과 달리, 자연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다. 전시 부제와 같은 작품 [다시 떠나다]는 청명한 날씨에 도로의 차들도 많아서 자못 설레이는 분위기지만, 작품 [환영합니다]에서의 환영 간판은 인적없는 텅 빈 배경의 전기줄처럼 썰렁하다.
한국에서 미국의 유타주로 이사하면서 봤을 그 간판이 얼마나 심란했을지 느껴진다. 강유진이 다시 떠난 장소는 넓고 황량한 분위기다. 세계 제1의 강대국이라서 풍요롭고 안전한 나라지만, 총기사고로만 한해 4 만명 가까이 죽어 나가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내전이 일어나는 곳이 미국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곧 유목민적인 융통성을 발휘하여, 자신의 새로운 경험을 작품에 쏟아 넣는다. 처음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장소에서 작가는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국가를 이동하는 이사라는 신변 변화의 와중에도 거의 2019년에 제작된 작품들로 채워진 이번 전시는 작업이 낯선 환경에의 적응을 돕고, 더 나아가 낯선 환경이 작업의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임을 알려준다. 그림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늘 하던 것이며, 낯선 곳에서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은 적응의 과정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림이란 늘 ‘다시 떠나는’ 과정이다. 열심히 그리는 작가도 하얀 캔버스 앞에서의 고통(과 열락)이 면제되지 않는다.
늘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술이다. 자신의 삶에 항상성을 유지해 줌과 동시에 새로움이 실험되고 실현되는 장을 가진 이가 바로 작가이다. 그림 속 소재들은 대체로 평이하다.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떠올리는 소재가 대거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단지 연말에 진행되는 전시이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기억은 존재론적—질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논한 기억의 특징으로, 존재론적 기억은 지금 여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인 것이어서, 언제나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또는 있었을 법한) 장식이나 음식이 가득하다. 한 가족의 즐거운 추억이 담겨있는 작품 [사과 따기]에서 시간차를 둔 아이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은 아이가 평생 간직할 법한 그때의 빛, 색깔, 소리, 향기 등을 화면 한가득 담아낸다. 그때의 지각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 작가는 색의 선명도의 신선도 유지에 힘을 썼다.
식물을 매우 가까이서 본 시점이 있는 작품 [초록 1]은 초록이라는 하나의 색이 빛의 조건에 따라 얼마나 많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초록 잎새들에 가늘게 들어간 붉은 선들은 관념이 아니라 지각에 생생하게 호소하기 위해 낭만주의나 인상파들이 활용했던 색채대비를 연상시킨다. 자연의 색이 단조로워지는 겨울에는 문화의 힘을 빌어 활기를 되찾는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소재들은 인위적 선택을 통해 자연에 존재하는 녹색/붉은색의 대조를 재생산한다. 크리스마스 자체가 탄생, 부활, 재생이라는 신화적 종교적 관념과 연관되며, 이는 자연에 내재하는 상보(相補)적인 힘의 조화에 바탕 한 것이다. 작품 [포인세티아]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잘 쓰는 붉은색 식물과 붉은 열매가 올려있는 케잌이 세밑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작품 [호랑가시 나무]에서 붉은 열매들, 그것이 패턴화된 것들, 그것을 활용한 케잌 등이 여러 버전으로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이 추위에 움츠러든 계절 축제를 비롯한 문화적 행위는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겨울은 어느 시기보다도 물질적 풍요의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 맨발의 성냥팔이 소녀는 자신이 가진 환시(幻視)의 힘에도 불구하고 얼어 죽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5월 무렵 보리수 아래의 부처는 극도의 금욕에도 죽지 않았다. 겨울의 스펙터클은 죽음을 극복하는 영양, 따스함, 활기 등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을 끄는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작품에는 저기 있는 것을 면전에 확 끌어다 놓는다. 자신을 둘러싼 스펙터클에 반응하는 작품은 대중의 시선을 끌지 않으면 소용없는 스펙터클만큼 강한 시각성이 작동된다. 또한 그것은 세계를 이미지로 이해함으로써 삶과 작업 사이의 괴리 또는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익숙함에서 낯섦을 낯섦에서 익숙함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선과 색 같은 조형적 요소가 관객의 면전에 가져다 놓는 소재들임과 동시에, 조형적 요소 그 자체가 눈에 띈다.
그렇다고 완전히 추상에 기울지도 않는 강유진의 작품은 스스로의 바램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고 그 경계의 선 위에 나의 그림이 위치하길’ 바란다. 그것은 경계를 넘나들면서 ‘경계를 강하게 의식해야 하는 유목민의 관점’(로지 브라이도티)이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온갖 신기한 것은 다 보고 다녔을 법한 작가가 애호하는 소재는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다. 옷을 돋보이게 하려는 디자이너가 미인에게 자기 옷을 입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사과나 케잌, 크리스마스 장식, 산과 도로 등은 그리기라는 본격적 행위를 위한 평이한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지시대상만큼이나 지시 행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재나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에 목적이 있었다면 그렇게 교란적인 붓질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지각에 충실한 가운데, 작가가 처한 새로운 좌표들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는 새로 이사 간 장소가 산악지대라서 산세의 표현이 이국적이다.
소재의 평범성을 뒤흔드는 요소는 변신이다. 빵집의 진열대나 파티의 식탁 앞에 놓였을 법한 먹음직스런 케잌은 지각과 기억의 기묘한 상호작용을 통해 갑자기 웅대한 산의 모습으로 변신하곤 한다. 작품 [크레이프 케잌이 있는 산]에서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 눈 앞에 떠 있는 것은 달고 기름진 첨가물이 첩첩이 쌓인 케익처럼 보이는 산이다. 조각 케익의 단면처럼, 지층의 단층처럼 시공간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해체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고속도로를 타는 긴 여행길에서의 끝없이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풍경은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토로하곤 했던 몰입의 경험을 자아낸다. 강유진의 작품에는 몰입에서 야기되는 몽환성이 있지만, 그것이 연극무대 지향적인 설치작품이 아니라 그림에서 관철된다. 방심하는 눈을 융단폭격하는 듯한 강렬한 현재성 또한 선명하다. 길 위의 풍경이 많이 등장하는 이번 전시 작품은 길을 따라가는 시간적 몰입과 강렬한 공간적 단면이 공존한다.
시각성은 순간의 충만함을, 그리고 시간적 몰입은 지속의 경험을 낳는다. 깊숙이 들어가는 시점이 현재적 단면에 의해 상쇄되곤 하는 강유진의 그림은 시각성에 충실한 모더니즘의 방식과 시각성을 극복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이 함께한다. 작가의 여정과 관계되는 화면을 관객은 눈으로 진입하며 추체험하는 풍경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림이다. 색과 형태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회화의 조건은 풍경으로의 들어섬을 막아선다. 에나멜같이 광택과 물성이 강한 재료를 쓰는 강유진의 작품은 화면 밖으로 당장 쏟아질 듯 쇄도하는 색의 흘러내림과 형태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작품 [산과 오렌지]는 눈이 희끗희끗 보이는 듯한 산등성이 아래가 오렌지색으로 녹아내린다. 흘러내리는 형태는 그것이 산의 풍경이자 물감이 뒤덮인 평면임을 말한다. 도로를 끼고 보이는 산이 많이 등장하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는 다시 떠난 시점을 반영하는 낯섦이 느껴진다.
물론 그것은 미국이 큰 나라여서이기도 하지만, 미학적 용어로 분류하면 아름답기 보다는 숭고한 풍경이다. 유타주의 산악지대는 눈 안에 쏙 들어오기보다는 경외감을 자아내는 풍경이다. 화면 중간이 쩍 갈라진 것 같은 [금 산]은 굳어있는 산의 재현이 아니라 생성하고 소멸되는 실재의 과정을 드러낸다. 작품 [해질녘]에서의 산 또한, 변화가 일어날 균열과 틈새를 강조한다. [다시 떠나다]에서 보이는 앞산은 속도감 있게 찍었을 색 점이 역동적이다. 도로나 길과 달리 산은 이동과 무관한데, 묵직한 랜드마크가 되어야 할 산은 더 부산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색 선들은 마치 미로처럼 보인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작가가 자유롭게 휘둘렀을 선을 따라 정처없이 이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미로같은 상황 또한 유목적이지 않는가. 지름길 없이 끝없이 우회하는 유목민의 길은 미로를 닮았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만물은 말하자면 직선도 아니고 곡선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물은 근본적으로 유동적인 것으로 구상, 되는대로 뻗어 나갔고 목적도 없고 의지도 없고 법칙도 없이 헤매고 다녔다. 움직임은 명백히 자연을 나타내는 것이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표현’이라는 파울 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로는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에게 준 마지막 메시지라고 말한 바 있다. 아탈리는 유목에 고대적인 관점을 제거하고 21세기의 비전을 첨가한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가지고 떠나는 유목의 시대, 여전히 회화는 건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화가이자 유목적 삶을 사는 작가가 직면한 불확실성일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함만이 확실하다는 역설 속에서 여전히 인간의 자율과 자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 층의 산과 들, 하늘로 이루어진 탁 트인 풍경이 있는 작품 [전망]은 상호이질적인 요소들을 병치함으로써 동감을 부여한다. 여기에서는 산도 구름처럼 꿈틀거리고, 전경의 숲은 한 장면에 사계절의 순환을 담은 듯이 여러 국면이 보인다.
도로나 건물 같은 인공적인 구조물은 자연을 더 크게 보이게 한다. 작품 [오르막]에서는 길가의 작은 건물들을 품고 있는 거대한 자연이, 작품 [솔트레이크 시티]에서는 능선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흐름을 잘라내는 인공적 구조를 강조한다. 지면 위에 그려진 각종 교통 관련 기호들은 대자연을 정복하여 자원으로 만든 국가의 위상을 알려 준다. 작품 [제한 구역]처럼 전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야생적 장소에도 선명한 기호들은 자연의 법칙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는 인간의 규칙을 보여준다. 작품 [박람회 가는 길]에서 산뜻한 스트라이프 천막이 있는 전경과 길 위의 기호들은 현대 유목민을 위한 지표들이다. 최초의 대지에 소유나 점유를 알리는 선을 그은 사람은 누구일까. 유목민들은 이제 자연 및 문화와 관련된 길보다는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따라 이동한다. 점과 선은 시스템의 산물이다. 21세기의 유목민은 이전의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소통의 매개자이다. 유목민/작가는 여기와 저기를 이어나가며, 여기와 저기 사이에서 전에 없던 것을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