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움과 뜨거움, 그 사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최근에 열린 강유진의 ‘Splash!’ 전을 채우는 작품들은 수영을 좋아하고 그래서 잘하는 작가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3년마다 이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영장은 어디나 비슷하여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수영장은 철저한 기능주의의 산물이기에 보편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수영선수의 몸을 보면 인종, 심지어는 성별도 거의 초월하지 않는가. 수영장의 구조나 수영하는 사람의 몸 등은 같은 규칙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강유진에게 어릴 때부터 한 그림 그리기 또한 수영과 마찬가지로 좋아함-잘함-편함의 연결망에 걸려 있는 중요한 일이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구비되기는 힘들다. 좋아한다고 해서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하기 위한 조건이 좋아함과 편함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웅크린 채 몰입해야 하는 그리기의 속성상, 전신의 격렬한 움직임을 일상의 중요한 상수로 삼는 점은 건강을 위한 수단 이상이다. 수영장에서 작업의 소재를 얻는다는 차원도 넘는다. 강유진은 수영과 그리기의 본질적인 유사를 생각한다.

발끝으로만 수영을 할 수 없듯, 손끝으로만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수영은 그림처럼 홀로 하는 것이며,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때로는 프로 선수처럼 경쟁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 수영장은 다수의 시선이 꽂히는 경기장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강유진은 수영선수는 아니다. 그러나 선수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전시작품은 거의 수영장 풍경으로 채워졌는데, 수영과 예술의 동형성은 무엇보다 ‘Splash!’라는 전시 부제처럼, 수영의 시작을 알리는 기표로부터 생겨난다. 분초를 다루는 경기에서는 스타트가 중요하다. 분초를 다투지 않는 취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물에 잘 들어가기 위해서는 힘을 빼고 쑥 들어갈 것을 권한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폼잡다 보면 볼썽사나운 모습(일명 배치기)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실패하는 입수(入水)는 성공적인 입수에 비해 요란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상적인 입수는 겁 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도 힘을 빼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기 또한 그림 속에 일단 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속에는 작업에 몰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지뢰처럼 깔려있다. 들어가고 나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시작은 자신이 했지만, 그림의 안내에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사회의 다른 일과 달리 자기 주도적인 작업이지만, 이 또한 어느 단계에서는 주체의 의지로만 가능하지 않다. 화가/그림은 자율적이지 않다. 다만 자율적이고 싶을 따름이다. 물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가는 것, 그것이 작가가 몸소 체득한 수영과 작업의 공통점이다. 이것저것 재고 나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두려움과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자발적 타발적 유목을 포함해서 생활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여러 일에도 불구하고, 대작이 많이 있다는 것은 두 과정의 비유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음을 알려준다. 주로 사용하는 에나멜이라는 독특한 매체 또한 유체적 존재에 심신을 실어야 하는 것과 관련된다.

산업용 도료인 에나멜은 색상이 다양하지 않고 독성도 강해서 그림의 재료로 잘 사용하지 않지만, 반짝이는 것과 흐르는 것에 대한 작가의 취향에 맞아 2000년 졸업전시회 때부터 사용해왔다. 붓자국이 남지 않고 마블링 효과도 있어서 의도와 우연을 절묘하게 섞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 화려함은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림에 힘을 실어준다.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주요 풍경은 ‘시원하게 뚫린 거대한 규모의 텅 빈 공간’과 ‘공간의 벽이 되는 표면이나 그 공간이 포함하고 있는 구조물의 표면’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고 표면의 광택이 특징적인 에나멜을 통해 표현한다. 감춰진 붓터치는 깊이감이 결여된 스펙터클을 잘 표현할 수 있다. 소재인가 기법인가, 취향인가 작업인가 등은 어느 것이 더 먼저라고 할 수 없는 복합적인 결정의 산물이다.

형식보다 내용이 먼저라면, 흐르는 것에 대한 취향이 그림의 재료로는 흔히 쓰이지 않는 에나멜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국내외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아오는 동안, 새로이 접하게 된 스펙터클에 시각예술가로서 반응이 포함된다. 수영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그렸지만, 이전 작업을 보면 미술관도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테이트 뮤지엄, 빌바오 뮤지엄 등 예술작품을 진열하기 위해 깔끔하게 정돈된 구조를 바탕으로 ‘튀기기’를 시작한다. 수영장도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백지나 화이트 큐브와도 같은 위상을 가지지 않는가. 누구나 자신이 처음 접한 스펙터클에 강한 인상을 받기 마련이지만, 작가로서는 단순한 수용을 넘어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멋진 미술관 건물뿐 아니라 거기에서 우연히 본 어떤 작품이 영혼을 흔들 때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들이 작가다. 보통의 관객이 스펙터클을 그저 소비하는 것에 머문다면, 작가는 마치 수영하는 것처럼 그 내부로 들어가서 전신으로 상호작용 한다.

매번 새로운 물에 던져진 존재로서는 당면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삶의 과제도 절박하다. 강유진에게 세계 각국의 스펙터클은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유동적인 인터페이스이기도 하다. 인공광과 자연광을 반사하면서 깊이를 잘 가늠할 수 없는 수면 또한 접면이자 입구가 될 수 있다. 작품의 대표적인 장소인 수영장과 미술관 외에, 공항, 대로, 진열대나 쇼윈도 등도 대표적인 스펙터클이다. 현대의 대중에서 스펙터클은 그저 잠깐의 관심을 자기고 흘러가는 풍경에 불과하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분석했듯이,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서 자본의 흐름이기도 한 스펙터클은 대중을 소외시킨다. 그의 논지는 사람들로부터 빠져나간 무엇이 다시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강유진의 작품에도 스펙터클의 외재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공풍경에서 사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부분을 찾아서 그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무)의식적이다.

오히려 인간이 뜸할 것이라 기대되는 자연풍경 속에서는 인간이 있다. 자연적 환경으로 이사했을 때 가족이 등장하는 풍경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풍경이든 자연풍경이든 풍경과 인간의 차이는 크다. 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대조할 때, 강유진의 풍경은 숭고에 해당된다. 인간은 작거나 부재한다. 현대의 새로운 자연 내지 생태계인 스펙터클 또한 19세기의 낭만주의자가 맞딱뜨렸던 거대한 자연/우주만큼이나 숭고하다. 강유진의 작품에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대조가 있다. 미술관이 나오는 작품들에서 작가는 잘 정돈된 차가운 공간 속에 고깃덩어리나 심장같이 이질적인 것들을 배열하고 충돌시키며,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자극과 의미를 추구했다. 그 풍경이 공허하면서도 몰입을 야기한다는 역설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로 비교되는 항목 간의 대조는 잘 사용되는 어법이다. 작업에 활용하는 사진과 포토샵은 그림보다는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기에 조합도 용이하다.

강유진의 화면에는 추상과 구상, 직선과 곡선, 의도와 우연 등이 공존한다. 그 외에 ‘2차원의 패턴/3차원적 공간, 세부/전체, 뜨거움/차가움. 불편함/안락함, 이상/현실, 습함/건조함, 곡선/직선, 환영/물질...’등이 작가가 염두에 두는 대조군이다. 대조군의 충돌은 하면에 긴장감, 또는 (상호보완에 따른)조화를 준다. 현대철학 중 구조주의는 대조군을 잘 활용하곤 했다. 가령 이 학파의 시조인 레비 스트로스는 장기간 변화가 없는 차가운 세계(신화, 자연, 날것)와 그렇지 않은 뜨거운 세계(역사, 문명, 익힌 것)를 비교했는데, 인생이나 예술 또한 이러한 상수와 변수가 함께 작동하는 것 아닌가. 작가로서는 각각의 항목보다는 그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 2006년 금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부제는 ‘between’이라고 정하기도 했다. 2019년 ‘Splash!’ 전에서는 시선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방식이 대조된다. 전경과 원경 간의 원근법이 급격하게 적용된 화면에서 관객의 시선을 화면 깊숙이 꽂힌다. 동시에 요란한 입수의 흔적은 되돌린 영상처럼 시선을 바깥으로 나오게 한다. 수영장의 표면의 평온한 반짝거림을 파열한다.

잘 정돈된 스펙터클의 차가움은 열정적인 행위와 대조, 또는 결합 된다. ‘Splash!’ 전의 작품 [Swimming Pool]에서는 근경과 원경 사이의 크기가 과장되어 있다. 그것은 육안이 아니라 외눈박이인 사진의 시점이 반영된 것이다. 푸른 물과 붉은 구조물의 대조도 선명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반응하며 어른거리는 물표면, 건축구조의 그림자가 있지만, 사람은 안 보인다. 인간이 없는 가운데 각자 자기만의 존재감을 발하는 스펙터클을 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선탠용 의자들에 둘러싸인 야외 수영장을 그린 [Splash!]에도 사람은 안 보인다. 그러나 숲으로 둘러싸인 인공 구조물에서 보이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는 유토피아를 생각나게 한다. 화면 한가운데 폭발하듯 솟아오른 물기둥이 평온한 구조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사람이 만든 구조에는 사람이 없고, 그 흔적만 있다. 작품 [Start]에서 보이는 사람은 출발선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그 역시 사람의 가장 큰 특징 부위인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수영장 물 위에 떠 있는 붉은 선은 그가 경기할 자리를 지정해주며, 선수는 단 몇 초 간의 차이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는 잔인한 게임에 던져진다. 물론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 그 또한 그 인간이 원해서 시작했을 일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승자독식 같은 구조적 잔인함이 있다. 그래도 대중의 시선들이 모두 꽂히는 경기장에서 경기 중인 사람은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 무대는 사라져서는 안되지만, 주요 무대가 사라진다 해도 각자 해왔던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 경기하는 자는 보통사람에게는 쉽게 등반을 허락하지 않는 험준한 자연을 앞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선수로 평가되는 전문가만이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상징한다. 최고봉에 올라가 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 심해에 내려가 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물론 그러한 장면들 또한 총천연색 스펙터클로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품 [Pool with Ice Cream]에서 수영하는 사람은 그가 일으킨 물의 궤적과 하나가 되어 있다.

뒤에 보이는 설산의 일부는 붉은색 시럽이 잔뜩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같은 형태로 녹아내린다. 연상되는 형태를 한 화면에 맞붙여 놓은 스타일은 2000년대 초반의 작품들과 연속적이다. 가령 눈 쌓인 산과 살코기의 하얀 지방, 또는 케잌의 그림과 눈을 연결시켜 정물과 풍경의 중간에 있는 작품이 그런 예이다. 이질적인 것의 대조는 언뜻 하나의 풍경처럼 보이는 화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품 [Pool with Holly Bush]에서 풀장 뒤의 장면에 가득한 호랑가시나무 덤불은 다른 규모의 장면을 한데 붙여 놓은 것으로, 이 현란한 얼룩들은 액션 페인팅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구상적 풍경에 추상이 가미된 것이다. 작품 [Pool with Camouflage]에서 수영장 주변의 숲은 위장색으로 대치된다. 위장색은 숲으로부터 추상된 것이지만, 이 추상물은 다시 자연화 된다. 액체적 유동성으로 가득한 화면에 시뮬라크르의 순환이 더해지면서 작품의 복잡도도 증가한다. 강유진에게 그림은 세상의 복합성을 담아내는 풀장과도 같다.